백두대간

하늘재~아우릿재구간

갱섭이 2011. 5. 9. 09:24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한

하늘재~아우릿재구간 종주

2011년 5월 8일 18.4km 12시간소요(03~15시)

 

 

백두대간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큰 줄기라는 의미를 뜻한다. 한반도의 뼈대를 이루는 산줄기로,

서해동해/낙동강 수계의 분수령이 된다. 이 산줄기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동쪽 해안산을 따라 남쪽 지리산까지 이어진다.

 총길이가 1625km이고 지리산에서 향로봉까지의 남한 구간만 해도 690km에 이른다.

 각 지방을 구분 짓는 경계선은 삼국 시대에는 국경으로 조선 시대에는 행정 경계로 쓰였다.

 그리고 각지의 언어풍습 등이 나누는 기준도 되었다.

백두대간은 한국의 풍속, 언어 등을 이해하는 바탕이 된 것이다.

백두대간의 개념이 언제부터 우리민족의 지리 관으로 자리잡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사료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은 조선 초부터 지도상에 반영되었다고 할수 있다
우리나라의 옛날 지도들은 산줄기 지도라 볼수 있는데 지형의 사실을 표현하고 그 줄기는 미세
하지만 뚜렷하고 명쾌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자세히 살펴보면 연결되지 않는 산줄기는 없다
1557년경에 제작된 전도류(全圖類)는 가장 오래된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국사편찬회 소장.
국보 제284호)를 비롯하여 그 이후에 제작된 정상기(鄭尙驥)유형의 동국지도(東國地圖)인 조선
팔도도(祖先八道圖)와 군현도(郡縣圖)에 이르기까지 모두 같은 맥락을 이루어

똑같은 산줄기를 그려놓았다.
그후 19세기에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도 이와 같은 지형 표현의 전통기법을 계승하여 심혈을
기울여 청구도(靑邱圖)와 동여도(東與圖)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제작 하였다.
대동여 지도는 정밀함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제작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도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대동여지도는 김정호 개인의 작품뿐만이 아니라 우리 지리관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우리 옛지도에 나타난 산줄기를 글로 정리 한 것이 1800년경 제작된 산경표(山經表)인데
단지 사료가 없어 고증이 안될 뿐이지만 산경표에서 체계적으로 정립되었다고 볼수 있다.
산경표는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浚)이 동국지도류의 산줄기 흐름을 토대로 문헌비고의 산수고
(山水考)를 집필한 내용을 가지고 누군가가 찬표한 것이다
지금까지 전하는 대표적인 본(本)은 세가지가 있으나 모두가 같은 내용이다.
산경표는 전국의 산줄기를 1대간(大幹), 2정간(正幹) 그리고 12개의 정맥(正脈)으로 규정 했고
여기서 다시 가지친 기맥(岐脈)을 기록했다.
산줄기의 순서는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백두대간을 중심 산줄기로 하고 여기서 가지친 장백정간과
낙남정맥을 우선하고, 백두대간의 북쪽으로부터 가지친 차례대로 순서를 정했다.
백두대간과 정백정간은 산이름을 표기하고, 해서와 호남은 지역 이름을 표기하였으며 나머지
11개는 강이름을 표기하여 산줄기의 이름을 정했다.
따라서 이름만으로도 강의 위치와 지역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강이름을 표기 하여 이름을 지은 것은 정맥의 정의를 강유역의 경계능선

즉 분수령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또한 강의 위치, 유역의 넓이, 모양을 알아보기 쉽게 하여 강과 그 유역을 파악하여 지형지세를
쉽게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방법이다.
산이 그 강을 이루는 물의 산지라는 인식를 비롯하여 산경표는 활용도를 중요시 하여

제작된지도였다.
1913년 최남선은 조선광문회에서 산경표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출판한 적이 있었는데  일제의
식민지 정책으로 가치는 묻혀버렸고 영영 빛을 보지 못할 뻔했다.
그런데 1980년도 대동여지도 복간을 준비하던 고지도 연구가 이우형씨께서 우연히 인사동
고서점에서 산경표를 발견하면서 몇가지 의문에 고심했던 산경표의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되었다.
그이후 이우형씨는 백두대간을 알리기 위해 많는 노력을 하였고 그 결실을 거두어

백두대간은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는 백두대간은 동과 서를 크게 갈라놓은 산줄기임과 동시에 동해안,
서해안으로 흘러드는 강을 양분하는 역할을 하며 태초에 백두대간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들은
저마다 대간의 저력을 닮은 모습으로 한반도 구석구석으로 가지를 쳤다.
기둥 줄기인 대간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10대 강을 경계 짓는 분수산맥(分水山脈)인 정맥들이
국토의 뼈대가 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길이는 약1,625여km에 이른다. 현재에 우리가 아직
가볼 없는 북녘 땅에는 약2000m급의 고봉들이 줄이어 있으며 남쪽에는 지리산에서 향로봉까지
도상거리 약670km에 이르는 거리에 설악산, 태백산, 속리산, 덕유산 등의 명산들을 품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온 산맥은 1903년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가 발표한 조선의 산악론
에 기초를 두고 일본인 지리학자 야스 쇼에이가
재 집필한 한국지리라는

교과서에서 기인된 것이다.
일제는 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자원 찬탈을 시도하기 앞서 고토분치로로 하여금 1900년부터
1902년까지 우리나라 지질을 탐사토록 한 결과 엉둥한 산맥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였다.
산맥은 백두산을 매개로 일체가 되는 우리의 민족의 구심점을 없애고 백두대간을 훼절시켜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도입되었다.
백두대간을 마천령산맥, 함경산맥, 태백산맥, 소백산맥으로 나누고, 그렇게 나눈 산맥에 잔 가지를
붙여 백두대간의 본래 모습을 알지 못하게 하고 낭림산맥을 강조 태백산맥과 낭림산맥의 선을 나라
지형의 중심축으로 부각시켰다.
태백, 소백등 다른 산맥은 모두 산이름을 표기하고 백두산이 있는 마천령 산맥은 고개이름인
마천령을 따서 마천령산맥이라고 지명하고 가장 짧은 산맥인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백두산 최고봉을 일왕의 이름인 대정으로 정하여 대정봉이라고 바꿔 놓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고토가 우리나라 땅을 조사한 기간은 1900년 및 1902년 두 차례에 걸친 14개월 동안이었는데
기술수준도 미약했던 약100년전에 한 나라의 지질구조를 단지 14개월이라는 단기간 동안 완전
하게 조사하는 일이 가능하였는가에 미심스럽고 아무튼 1903년에 발표된 고토의 지질학적 연구
성과는 우리나라 지리학의 기초로 자리잡아 지리교과서에 들어앉게 되었다.
고토는 땅속의 맥줄기를 산맥의 기본개념으로 하여 지질구조선 즉 암석의 기하학적인 형(形),
이것들의 삼차원적 배치의 층층을 기본선으로 하였는데 땅위의 산줄기들의 흐름은 무시되고
땅속의 모양새만 따지다보니 산맥줄기가 강이나 내를 건너뛰고 능선과 능선을 넘나들고 있다.
일제의 침략 야욕이 만들어낸 왜곡된 지리개념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해방 후 약50년이 넘도록 우리 지형에 맞지도 않는 산맥개념을

쓰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백두대간이야말로 우리민족의 삶의 터전인 이 땅을 가장 정확하게 읽어내고 표현해 낼 수 있다
할수 있으며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백두대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그 체계를
인식시켜 나간다면 머지않아 백두대간이라는 이름이 제대로 정착되리라 본다.
우리의 산줄기는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하여 지리산(智異山)까지 막혀 있지 않으며 한반도(韓半島)
의 골간(骨幹)은 서로 연결 되어 하나로 통하는 백두대간(長白大幹)과 백두대간(長白大幹)에서
파생된 2정간(正幹)및 12정맥(正脈)으로 정립된 이와 같은 산경표가 제작될 당시와 현재의 변화
상을 실제로 산행을 통하여 답사하여 보며 우리 땅에 솟아 있는 모든 산들은 강 또는 물을 건너지
않고 백두산까지 연결되어 있슴을 체험하는 백두대간종주가 십수년 전부터 일부 산악인들의 노력으로

시작되어 이제는 등산인들의 로망으로 자리잡아 여러 산악회에서 대간 종주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참여하는 등산인들도 점점 늘어가고 있다....

 

 

 

양재역에서 밤11시40분에 출발한 버스가 밤을 건너 새벽2시 45분에

하늘재에 도착하여 모두 한자리에 모여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어두운 산길로 들어선다.

 

 

칠흑같은 어둠 속,헤드렌턴 불빛에 의지해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데

거침없이 내달리는 선두들의 체력이 부럽기만하다....

 

 

 

월항삼봉(856m)이라는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이 있음에도 거의 모든 지도에 탄항산으로

표시되어 있음이 안타깝고 어두움에 한눈 팔것 없으니 진행속도가 빠르구나.....

 

 

 

하릴없이 계단 수를 세어보니178개이고 숨가쁘게 오르니 오늘의 첫 밧줄 구간이다.

 

 

어둠속에 돌아가는 암봉과 소나무의 모습이 아름답지만 똑닥이 디카에 담기는 무리일듯....

 

 

 

 

부봉삼거리를 지날때 쯤 날이 밝고 대간 마루금은 옜성벽과 나란히 가는데 성벽은

쇠락해 무너져가고 있어 세월이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등 뒤쪽이 해뜨는 방향이라 일출을 놓치지 않으려고 자꾸 뒤돌아보느라 속도가 느려지는데...

울창한 나무가지에 일출장면을 깨끗하게 카메라에 담지 못한다....

 

 

 

 

하늘재에서 월항삼봉에 오르는 가파른 능선이 힘들었지만 아침 햇살에 아름답게 보인다.

 

 

산아래에는 한참 철 지난 진달래가 이제야 붉은 빛을 뽐내고 나무들도 봄 옷으로 갈아입는중.....

 

 

 

오잉!...각시붓꽃이 우아함을 뽐내고 있네....

 

 

마패봉오름에서 왼쪽 계곡으로 운해가 깔려 첩첩히 산능선과 어울려 한폭의 그림을 연출한다...

 

 

 

 

 

△마패봉에 오르니 운해가 펼쳐놓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저절로 탄성이 터지고 언제 힘이 들었나 싶다.

운해 뒤로 멀리 속리산과 대야산의 대간능선이 보이고 왼쪽으론 오늘 걸어갈  조령산까지의

거친 암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맨 뒤 뾰족한 봉우리가 조령산 정상)▽

 

 

대간능선에서 약간 벗어난 신선봉.

 

 

아침식사장소인 조령 삼관문에 도착한다.이제 오늘 코스의 절반 정도를 온 셈인데

남은 암봉들이 부드럽게 통과시켜 줄런지....

 


높이 643m. 이화령으로부터 북쪽 약 7㎞ 지점인 조령산(1,026m)·신선봉(967m)·마패봉의 안부에 위치한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 만큼 험하다 하여 새재·문경새재라고도 한다.

 영남지방에서 소백산을 넘어 서울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로 조선시대의 주요교통로였다.

고개를 따라 조령천이 남류하며, 동·서 사면은 절벽을 이룬다.

 삼국시대에는 죽령과 계립령(鷄立嶺)을 이용했으나, 조선초 태종 때 새로 조령을 개척했다고 한다.

 산골짜기의 기슭을 돌아 오르게 되어 있는 천연의 요새지로 임진왜란 이후인

 1594년(선조 27)에 조령 제2관문인 중성(中城)을 설치했다.

그후 1708년(숙종 34)에 중성을 중건하고, 초곡성(草谷城:제1관문)과 영성(嶺城:제3관문)을 축조했다.

 즉 문경읍에서 이화령 쪽으로 2㎞ 떨어진 곳에 문경새재의 진입로가 있고,

진입로를 따라 약 3.5㎞ 거리에 제1관문인 주흘관(主屹關)이,

이곳에서 약 3㎞ 떨어진 산 속에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이,

다시 3.5㎞ 떨어진 곳인 조령에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이 있으며,

 관문 좌우로 성곽이 둘러져 있다. 1925년에 이화령에 국도가 건설되면서

 서울과 영남을 잇는 관문으로서의 역할은 상실했으나 1966년 3월 22일에 제1·2·3 관문과

성벽이 사적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 관문들을 복원하여

 주변을 관광지로 개발했고, 1981년 6월 4일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산채전과 더덕막걸리를 곁들여 아침을 먹는다....

(이미 샌드위치 하나,쵸코렡바 두개,연양갱도 하나 잡수셨다.)

 

 

 

호랑이 산신각이라는데 어떤 전설이 있는걸까?....

 

 

 

 

진달래 화사한 오름길에서 걸어온 능선을 돌아본다...(치마바위의 흘러내림이 웅장하다.)

 

 

 

△주흘산 영봉에서 주봉까지의 능선이 장쾌하고

지난번 걸었던 포암산과 대미산까지 당겨본다.....▽

 

 

 

 

밧줄에 매달려 힘들게 암봉을 오르면 바위위에 멋지게 생긴 소나무가 반기고....

 

 

 

 

오늘 밧줄잡는 곳이 예순군데쯤 된다 들었는데 ....

 

 

힘들게 오르면 그만큼 다시 내려가고...멋진 조망과 잘생긴 나무 감상하며 걸음을 옮긴다....

 

 

△자! 또 한번 넘어보자... 옆으로 조령산 봉우라가 보이누나...

 

 

날이 밝고나선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소리를 들으며 걸었는데 새소리는 카메라에

담을수가 없어라...또 모습도 잘 보여주지 않는데 나,그 소리들으려 일부러 선두에는 뒤쳐지고

후미에는 약간 앞서 홀로 걷는다.오른쪽 산아래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난다.

 

 

 

 

 

세번째 커다란 봉우리에 올라 바라보는  건너편의 신선암봉의 거창한 바위를 감상한다.

내리막 안부의 멋진 나무들과 암봉왼쪽으로 조령산도 바라보고....▽▽

 

 

 

 

 

 

지나온 봉우리 바위에서 사진 찍으라고 포즈를 취하는 한 대원...

그러나 이것이 똑닥이디카의 한계.....

 

 

 

오늘 처음 만나는 산죽길...등로는 깊이를 알 수 없이 아래로 떨어진다...

내려가는 만큼 다시 올라가야 하는데....

 

 

 

지나온 능선들....이제 삼분의이 이상 걸었다....△▽

 

 

 

신선암봉 정상의 넓다란 바위에서  선두의 꼬리를 잡는다. 

이들,여유롭게 양발까지 벗고 편안하게 쉬고있구나...오!...저들의 여유로움이 부럽다.

이 늙고 쇠약한 무릎으론  택도없는 욕심일까?...

 

 

함께 산행한 강달희씨가 못생긴 이모습을  카메라에 담으셨다....

꺼벙한 이 모습,배경이 너무 멋지다.

 

 

나도 한번 따듯한 바위에 드러누워 본다. 음~...기분이 좋군...

하늘을 보니 태양에 무지개색 해무리가 멋지구나...내일 비가 오시려나?....

 

 

 

 

녹음이 짙어가는 계곡에 사극드라마 촬영지가 보이네.... 

 

 

거꾸로 줄 잡고 내려가고...

 

 

또 내려가고....

 

 

자!...조령산 기슭으로 올라가보자......

 

 

 

 

지나온 신선암봉의 뒷모습.....

 

 

 

 

 

△마지막 봉우리로 생각하고 힘겹게 올라왔건만 또 한번 속았다.

대간종주는 사람 진을 다 빼고 나서야 끝을 보여준다 하더니 역시....

건너에 또 한봉우리를 보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지고 도가니가 아파온다.

그래도 활짝핀 진달래는 색이 곱다....▽

 

 

 

드디어 조령산에 발자국을 찍는다.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니 오후 한시,휴식시간 포함

열시간 걸렸구나. 마지막 물병을 개봉한다.조금 내려가면 샘이 있다 했으니....

 

 

간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내리막을 걷는다. 잠시후에 다가올 비극은 꿈도 못꾸고

세잎양지꽃과 가락지나물을 감상하는 여유를 부린다...

 

 

 

 

음~...물맛 좋군...

 

 

 

구슬봉이(용담과)와 산자고(백합과)

 

 

 

컨디션이 괜찮으면 산자고와(쉽게 볼수있는 꽃이 아니다) 좀 놀다 가겠는데

이미 무릎이 아파온지 한참이라 그냥 사진만 찍고 지나친다....

 

 

 

이정표에 왼쪽은 20분, 직진은 15분으로 적혀있어 직진을 하였는데 고도를 100m쯤

힘겹게 올리더니 급경사의 내리막이 엄청나다...무릎이 아플때는 내리막에서 통증이

더 심하다.  그나마 출발전에 무릎에 파스를 붙이고  보호대까지 착용했건만.....

(소백산구간부터는 거리가 더 길어지고 날도 더워질텐데 어찌하나 고민이다.)

이정표에 표시된 시간은 이해할 수 없구나...집에 와서 지도를보니 우회로가 30분으로 표시되어 있다.

 

 

헬기장의 할미꽃,백발이 되어가는구나....

 

 

 

 

이화령휴게소에 도착하여 오늘 산행을 마감한다,다소 더웠지만  맑은 날씨에 아름다운 풍경,

예쁜 새 소리와 귀한 꽃과 함께한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화령 고개(548m)..
문경지방에는 지난날 '새재로 갈까, 아우리로 갈까' 하는 노랫말이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새재는 '문경새재'를 말하고, 아우리는 '아우릿재' 즉 지금의 '이화령'을 말한다고 한다.
아우릿재는 길이 험하여 혹 산짐승이나 산적을 피하기 위해

'함께 어울려 넘는 고개'라 해서 불려진 이름이라 추측하고 있다.
그러던 이름이 일제시대 때 이화령(梨花嶺)으로 고쳐 불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제시대 이화령 신작로 부역에 참가했던 노인들은 이곳 일대에 돌배나무가 있어

봄이면 배꽃이 피기는 했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한 많은 사연이 함축된 우리 고유의 이름이 침략국 일본에 의해

엉뚱한 이름으로 변질된 한 사례인 것이다.

(잘못된 것을 고치려 하지않고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더 잘못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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